러스크 엔딩로그

​​​​​999 러스크는 잔류하는 것에 면역이 없었다. 폭풍우가 식고 남은 싸늘한 한기에도 그는 몸을 움츠렸다. 신성 이브리도의 종결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과정 속에서 단계마다 움트던 피와 땀, 감정의 소용돌이는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휩쓸려 사라졌다. 얼마나 근소한 차이로 누구는 익사하고 누구는 떠올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 번 깨진 것은 어떻게 붙이든 다시 빛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억울할 것도 없다, 과정보다 절대적 결과만이 중요한 것은 본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의 계산식에 문제가 생긴 건 어쩌면 조금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는 열흘 남짓 그것을 증명해내지 못했던 것뿐이다. 시간, 돈, 위험부담, 끝과 끝이 가져다 줄 결과까지. 러스크는 그런 것들을 계산기 없이도 아주..

로그 2019.04.27

PHEI

​​전염은 무호흡의 사유가 되지 않는다 수면의 표면장력은 언제나 페이에게 가혹하리만치 애매한 힘을 행사한다. 가라앉을 듯 말 듯 밀어내다가 어느 순간 균형이 깨지면 그는 잠든 줄도 모르고 내내 가라앉아야 했다. 원체 제 손아귀에서 벗어난 모든 상황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안하무인이었던 남자는 그렇게 불면증에 매인다. 악몽에서 건져진 그는 푹 젖어버려 호흡을 갈구한다. 엎드려 반쯤 웅크린 자세에 거칠게 숨을 몰아쉬자 등이 오르내렸다. 제대로 챙겨 덮었을 리 없는 이불이 언제부터 꼼꼼히 덮여 있었는지 어깨에서 미끄러져 떨어진다. 잠에서 깨면 죽은 듯 누워 숨을 진정하는 것은 숙제였다. 끌어올려진 강제적 현실감각에 적응하는 과정은 늘 삼십 분 정도가 걸린다. 물에서 꺼내져 가련하게 펄떡이는 물고기에 비유하..

로그 2019.04.27

큐피드의 서열정리

​​​​​​​삼월 치고 날씨가 꽤 추웠음에도 꼭 차가운 커피를 마셔야겠다는 연아의 고집이 워낙 완강했기 때문에, 재호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 커피숍 안으로 밀어 넣어져야만 했다. 연아는 항상 다소 제멋대로였다. 불쑥 영화를 보자면 주말 아침 늦잠을 자다가도 눈곱만 떼고 달려 나와야 했고, 좋아하는 히어로 액션 영화를 두고 마음이 찢어지는 슬픈 로맨스 영화를 예매해야 했다. 그러나 언제나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건네받은 휴지에 코를 풀며 눈물을 찔끔 짜는 건 정재호였고, 그런 그의 등을 두드리는 건 오연아였다. 재호는 쪽팔려서라도 그녀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편이었다. “카라멜 마끼아또 아이스 한 잔이요. 얼음 너무 많이 넣지 마시고, 커피 한 샷 반만요. 카라멜 꼭 다 녹여주셔야 해요? 바닐라..

로그 2019.04.27

우현재호

​​​​​우현x재호 옥상삽질 여름 해가 가장 높게 걸리는 정오 쯤의 학교 옥상은 차라리 복도에라도 다시 기어들어가고 싶게 할 만큼 뜨겁다. 뭇 청소년들이 옥상에서의 일탈을 마치 학창시절의 로망처럼 여기는 것에 비해 감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고등학교 옥상은 사뭇 익숙한 색감의 초록색 페인트 칠을 한 바닥이 일본 청춘물 영화에서 본 것과는 너무 달랐다. 점심시간 때가 되면 그늘이라고는 문 앞의 일 미터 정도밖엔 남지 않는 금단의 성역은 칠 팔월 쯤 되자 딱히 문단속을 하지 않아도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 비인기 구간이 되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열이 나는 남고생들은 아무리 선생들의 시야 안이라 해도 에어컨의 사정거리 안을 맴돌면 맴돌았지, 그 밖 작열하는 태양 아래 서 있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로그 2019.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