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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아이즈

로그

2020. 10. 8. 04:33

스위니

SWEENIE

개인로그

 

 

 

 

 

뭐... 어쩌겠습니까? 나는 애초부터 이다지도 멍청한 낭만주의자였는데. 연명해 온 20년 동안 허락된 낭만이라곤 나이프에 칼질밖에 없던 남자가 늘어놓는 궤변은 얄팍했다. 지금 이게 애들 장난도 아니고, 감상에 젖어있을 만한 상황은 아니지, 스위니. 도마에 오른 남자가 칼을 든 남자를 향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쇼크로 뒤질 것 같아서, 역겨우면 내 묘비에나 그렇게 쓰세요.

 

 

 

***

 

 

 

그는 도마위에 놓인 횟감이었다. 이번에도 섣부른 장난질의 대가였다. 정말이지 매 번 적어도 세 배씩은 몸집을 부풀려 되돌아오는데. 스위니는 문득 자신이 해본 첫 칼질을 회상한다. 그때 그의 거주지는 프랑크푸르트의 어느 뒷골목이었고, 지붕은 커녕 차양 하나 없었다. 빈민이었던 그와 아이들이 공유하는 것 중 멀쩡한 것은 나이프 두어개와 싸구려 정장 뿐이었던 때였고, 나이가 겨우 열 여섯이었다. 걔네들 이름이 뭐더라. 크레이그, 요트, ... 기억 안 나. 그걸 기억해내기엔 그가 지나쳐 온 이름들이 너무 많았다.

 

그 날은 스위니가 거리로 나가는 날이었다. 당장 입에 넣을 빵과 치즈도 가진 게 없는 뒷골목 애새끼들에게 멀쩡한 정장이 한 벌 있다는 건 곧 그 쓰임새가 정해져 있다는 걸 의미한다. 스위니는 다행스럽게도 괜찮은 옷을 걸치면 손끝이나 손가락이 검거나 굳어도 뒷골목 빈민층처럼은 보이지 않는 편이었다. 적당히 말쑥하게 챙겨 입은채 거리로 나가면 말을 붙일 때 부터 경멸받는 일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손이 빨랐고, 무리 중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아 사람을 속이는 일에 스위니를 따라갈 수 있는 아이가 더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부쩍 키가 커 하나 뿐인 양장복이 맞지 않을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최근의 ‘외출’은 죄다 그의 몫이 되었다. 

 

 

 

그 날 스위니가 주운 손수건에 우아한 자수로 수 놓인 이름은 벨라였다. 비싸다는 장미 자수가 둘러져 있었고, 꼼꼼하게 박음질 된 실 한 가닥 한 가닥이 통통했다. 이름은 프랑스식 발음으로 읽는 것 같았다. 마담 벨라 앙트완은 소년들의 저녁 끼니를 위해 기꺼이 소매치기의 피해자가 되어 온 여느 여자들처럼 어쩌다 스위니를 마주친 케이스였는데, 그녀가 처음부터 그의 바닥을 알아보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스위니는 구실 좋게 돈이 많아 보이는 여자에게 접근하는 데에 도가 튼 열 여섯이었으며 마담은 그를 꽤 마음에 들어했다.

다만 기껏해야 뒷골목이나 전전해 온 젖비린내 나는 소년에 비해 마담은 경험과 연륜이 넘쳐 흐르는 여자였고, 스위니는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게 휘두르는 법을 그 여자에게 처음 배워야 했다.

 

그의 첫 칼질이 그래서 어땠느냐고 하면 일단 처음은 고기였고, 그 다음이 간이었다. 오리인지 거위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스위니의 나이프가 고깃덩이에 그렇게 부드럽게 꽂히는 일이 다시는 없었다.

 

스위니는 마담 벨라 앙트완의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종업원이 손수 펼쳐 앞에 놓아준 메뉴판에는 그림이 없었다. 일부러 실수인 척 몸을 부딪히고 품에서 슬쩍 빼낸 손수건을 주워주는 척 말을 붙이고, 사과의 인사를 건네며 고상하게 이빨을 깐 보람도 없이, 그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벨라 앙트완은 긴 은발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올리고 새빨갛게 붉은 입술을 한 여자였는데, 나이와 그에 걸맞는 기품이 겉으로 드러나는 묘한 매력의 귀부인이었다. 한 글자도 더듬더듬 읽을까 말까 한 메뉴를 앞에 두고 그녀의 빨간 입술에 시선을 박은 채 눈치를 살피던 그 영원같은 침묵은 여전히 종종 잊을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결국 열일곱이 되기 전에 글을 전부 깨우쳐 읽지 못하는 글자가 없게 되었음에도 가끔은 이 때의 꿈을 꿔야만 했다.

 

 

“글을 모르는데요.”

 

 

스위니는 결국 그 여자의 장갑에 촘촘히 둘러진 레이스를 바라보다가 이내 솔직하게 자신의 몰상식을 고백하고 말았다. 뒤집어 털어도 나오는 것 없는 근본 없는 새끼가 바닥을 까 보인다는 건 실로 충동적인 행위였으나 마담은 뾰족하게 그려진 입술을 말아올리며 그저 우아하게 웃었다. 무언의 용서였을까, 이후 그의 앞에 놓여진 건 약간의 포도주와 핏물이 약간 배어나오는 거위─오리였을지도 모른다─요리였다. 

 

마담이 조용하고 낮게 그 나이프가 아니라 오른쪽에 있는 것을 집으라고 명령했을 때 스위니는 홀린듯이 그렇게 했다. 생선을 써는 나이프와 스테이크를 써는 나이프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안 건 그녀와 헤어지고도 반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마담은 스위니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상대에게 단지 허황되고 듣기 좋은 말을 잘 포장해서 잔뜩 들려주는 것 뿐이었는데,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했으나 마담은 이 역시 용서했다. 그는 첫눈에 마담이 그다지 자비로운 성정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녀가 식사가 끝난 후에 저택으로 오겠느냐는 물음을 던졌을 때에는 망설이는 척도 하지 않고 즉시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가 걸음마를 몇 살에 뗐는지 증언해 줄 사람은 없었지만 스위니는 틀림없이 배움이 빠른 편이었다. 기갈과 생존본능에 의탁한 머리통들이 으레 다 그렇지 않은가. 첫번째 칼질을 떼는 데에 16년이 걸렸지만 마담 벨라 앙트완에 옆자리에 앉아 두번째, 세번째를 행하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종내에는 횟수를 세는 것을 잊기도 했다. 스위니는 윗사람들이 향유하는 언어 몇 개와 예절 몇 가지를 익혔다, 하나 같이 빈곤한 자가 알 리 없는 것들이었다.

 

마담은 보란듯 자신이 공들여 정돈한 스위니를 마치 고가의 유리공예 악세사리마냥 제 오른팔에 걸고 다녔고 스위니는 기꺼이 그녀의 비호 아래에 기생했다. 마담은 한 번도 못 배운 치장품을 위해 무언가를 길게 풀어 설명해주는 법이 없었지만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럭저럭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야금야금 지식을 훔쳐 먹은 스위니는 도둑고양이처럼 몸집을 불렸다. 그는 이따금 뚱뚱해진 통속의 뇌와 살찐 거위의 간이 접시 두개에 걸쳐 차례대로 식탁에 오르는 꿈을 꿨다.

 

처음 만날 때 입었던 반쯤 낡은 정장세트는 그날 밤 호텔 쓰레기통에 쑤셔박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여자와 뒹군 것도 아마 그 날이 처음이었다.

 

어쩌면 공동재산이었던 것을 탈피하고 다시는 꺼내보지 않을 것을 각오하며 쓰레기통에 처넣는 일련의 과정은 약간의 죄책감을 동반한다. 그럼에도 마치 집단 그 자체를 벗어나는 상징적 행위처럼 느껴져 어쩐지 숭고한 기분이 들었다. 한껏 도취되어 스스로를 절여넣는 와중에는 크레이그와 요트의 멍청한 얼굴이 결코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게 결국 어떻게 됐더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벨라 앙트완은 죽었다.

 

뒤졌으니 하는 말이지만 그녀는 나이가 있었고 그 배수 만큼의 허영심에 찌든 인간이었다. 그런 부류의 인간을 겉만 핥아본 어린 스위니에게 그녀는 위대한 구원이었지만 세상에 무결한 호의라는 건 없는 법이다.

 

당시에는 알 길이 없었으나 마담 벨라 앙트완이 다시 만난다면 그대로 지나쳤을 여자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는 과정은 스스로에게 꽤 가학적이었다. 생전 그녀는 자신이 뒷세계의 음험한 모략 한 가운데에서 타인의 목숨줄 여럿을 쥐고 있는 고귀한 여왕인 양 행세했지만 사실은 평범한 끄나풀, 혹은 중심 배달책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를 향한 경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스위니는 여전히 성숙하지 못했고, 낭만과 로맨스에 찌든 남자였으며, 따라서 그녀를 통칭 구원자라고 부르는 것조차 아직 관두지 못한 것이다. 스위니는 그녀를 계기로 자신의 구질구질한 골목길의 여생을 청산했고 조금 더 음습한 물 밑으로 가라앉게 된 인생을 꽤 마음에 들어했다. 그는 그녀를 위해 수치도 모르고 날것의 자신을 가져다 바치던 열렬한 과거를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 또한 어떤 의미로는 낭만적인 일이다…

 

 

그러고보니 덧붙이는 걸 잊었는데,

벨라 앙트완을 죽인 건 나였다.

 

 

스위니는 언제나 갈급한 인생을 살았다. 길바닥에서 시작한 근본도 없는 비천한 놈. 그는 늘 목 마른 채 더 높은 곳을 원했고, 생전의 마담 또한 그 점을 높게 샀다. 그런 나에게 기회가 생겼으니 움켜쥐고자 하는 데에는 당연히 질책할 데가 없지 않은가? 한 때 사랑했던 여자를 살해하는 건 정말이지 잔인한 일이었다. 스위니는 정확하게 그녀가 가르쳤던 경동맥을 끊었고, 피묻은 큼직한 진주알들이 카페트 위를 제 멋대로 굴러다니기 시작하자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벨라 앙트완이 쥐고 있던 신임과 선의, 비책 따위를 몽땅 털어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

 

 

 

***

 

 

 

그 다음부터는 조금 더 낭만적인 날들이 이어졌다.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흉통을 조여봤자 그가 견뎌 온 날들보다 허락하는 게 많있다. 스위니는 가리는 게 없었고, 가볍게 굴긴 했으나 아가리를 놀릴 때 밖으로 돌리면 수완이 좋았다. 나이프는 원래 잘 썼다. 멀쩡한 허우대로 복잡하게 얽힐 때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제 선에서 금방 슬퍼하며 끊어냈다.

 

객관적으로 쓸만한 조직원이었던 그는 금세 새 환경에 적응했다. 위스키를 따고, 샴페인을 부딪힐 땐 소매를 접으면 그만이었다. 핏자국이 남은 셔츠는 몇 유로를 지불했건 버릴 수 있었다. 크레이그와… 스위니를 추모하며. 혈향이 유독 안 빠지는 날에는 이따금 마담 앙트완의 파우더 향이 생각났으나 그는 쉽게 사랑에 빠지는 편이었다.

 

바로,

이렇게.

 

모르고 사랑했다는 말은 변명이 되지 않는 법이다. 그저 누군가가 생각나서 눈부신 은발에 반해버렸을 뿐인데, 알고보니 적대 조직의 딸이었다. 누구라더라, 그쪽 언더보스?

 

여자는 스위니를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그녀가 실제로 그를 사랑했는지는 끝까지 알 수 없었지만─그가 드럼통 안에서 눈을 떴던 그 순간부터 귀신같이 사라져서, 다시는 볼 수 없었다─스위니는 꽤 순순히 운명을 받아 들였다. 그의 보스는 목숨을 붙여 돌려보낸다는 조건 하에 그를 팔아넘겼고, 도마 위에 올라간 스위니는 손가락 네 개와 눈알 하나라는 불친절한 선택지 중에서 후자를 골랐다.

 

예컨대 사랑의 대가란 원래 그런 것이다.

 

수많은 사랑을 지나친 자만이 깨달을 수 있는 명제는 아니건만, 그는 알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사랑에 최선을 다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사랑이란, 원래 그토록 잔혹하게 운명적인 불꽃이라서, 본디 자기 자신을 뼈까지 갈아넣고 싶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드물게도 이 모든 과정에 충실한 로맨티시스트다.

 

사랑에 빠진 이상 거래의 우위를 계산해선 안 되기 때문에, 스위니는 자신이 적대 조직의 귀한 딸을 사랑한 대가로 오른 눈 하나를 적출당한다면 과연 어느 쪽에게 더 관대한 조건이었는지 끝까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의 악의가 자신의 멀끔한 얼굴을 반쯤 가로질러 망쳐둔 것에 대해서는 짧은 비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기어코 걱정하던대로 생 눈을 뽑히는 쇼크로 기절해서 돌아왔지만, 의안을 끼워넣어 안면이 무너지는 것을 막자마자 다시 자신의 비극적인 로맨스 아래로 가라앉았다.

 

빗나가는 법 없이 스칼렛 오하라 또한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 중 하나였다.

가장 열렬했던 말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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