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도를 가르는 건 스피드
로그
2020. 7. 9. 04:14
겸겸
어른들은 학교라는 장소에 또래의 미성숙한 아이들을 섞어 넣으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비생산적인 충돌과 잡음들이 그들을 성장시킨다고 믿는다. 도겸은 언제나 시달리는 쪽이었다. 원체 맞는 짝이 하나 밖에 없어 어디에도 맞춰 들어갈 수 없었던 탓이다. 불량품을 어떻게든 다듬으려는 노력들은 정말이지 지루하고 가혹했다. 형식적이고, 소모적이기만 한...
“겸아, 넌 형제 있어?”
열 일곱이란 세상에서 가장 상상력이 빈곤한 종족일지도 모른다. 이새끼들은 꼭 할 말이 없을 때 정리를 하려고 한다. 남자 새끼들은 서열정리를 하려고 들고, 여자애들은 호구조사를 한단 말이지. 오늘치 흥미를 금방 농구 경기에 다 써버렸더니 금세 권태로워진 참이었던 도겸은 별로 성실하게 대답해 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
“동생? 형?”
“여자야, 남자야?”
“남동생.”
몇 살 차이야, 어느 학교 다녀? 뭐가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필사적으로 궁금해하는 동급생들이 마치 상어떼 같다. 도겸은 눈을 깜빡였다. 성실하게 구라를 쳐줄 인정머리가 없어서 아쉽게 됐다.
“정신병원에 갇혀 있어. 애가 좀 돌았거든.”
그는 찬 물을 끼얹은 듯 미묘하게 훅 사그라드는 분위기를 기민하게 눈치채는, 딱 지금 이 순간이 싫었다.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고, 예민해도 너무 예민하다. 자기들이 물어봐놓고,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움츠리는... 실질적으로 피해를 본 것도 아닌데 좌중은 종종 이렇게 극도로 실망하곤 한다. 괜한 열의를 가지고 자길 파헤치고 물어뜯는 시선들이 뚝뚝 떨어질 때 도겸은 항상 기시감이 해소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약간 질린듯한 표정을 해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도겸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성의 없게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빙빙 돌렸다. 이렇게 꾸밈 없고 성의 없는 답이라니! 실망할 만도 하지.
입만 열면 어떻게든 말을 꾸며 남 속여먹을 궁리나 하기로 유명한 도겸이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건 딱히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가끔 정말이지 선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이따금 아주 무례했고, 근본이 없었으며, 질 나쁜 농담을 한다. 학교 애들은 전부 1학년 2반 도겸을 알았는데 모두가 그 기묘한 문제점을 알아차리지만 콕 집지는 못했다.
한자릿수에 접어든 윤리 점수를 책잡기엔 그는 너무 멍청했고 최소 세 과목 이상이 한자릿수였다. 집에는 돈이 많아서 일주일에 교복을 두 어벌씩 찢어먹어도 늘 주저없이 쓰레기통에 버린 후 새 교복을 사오고, 학부모 상담일에는 멀쩡히 아버지가 교무실을 찾았다. 말을 그렇게 하는데도 평소엔 또 시끄럽고 활기차서 멀쩡히 친구도 많다. 그의 와이셔츠는 또한 주름이 칼처럼 접히도록 다림질되어 있었기에 그가 가끔 아버지를 두고 부성애의 무의미함에 대한 이상한 농담을 치는 이유를 대변해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도겸이 조금 작은 것 같은 운동화 뒤축을 기어이 꺾어 신었다.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발이 조금 자랐다. 사던 사이즈로 샀는데 걔 것까지 한번에 전부 바꿔야겠다.
*
1학년 2반 학생 말이에요, 도겸이라는. 왜 이렇게 사고를 쳐요? 감당이 안 된다고, 감당이. 걔는 단순히 집중력 문제가 아닌 것 같던데...
그 친구 정신과 진료 기록이 있어서 아버지가 따로 부탁하셨잖아, ADHD라고. 치료 중이래요.
*
어젯밤엔 비가 내렸는데도 남자애들이 축구를 하고 좀처럼 운동화 밑창을 털지 않았기 때문에, 복도는 모래 투성이였다. 이러면 또 청소 당번들이 물걸레질을 하면 진창이 된다고. 투덜대던 애들까지 전부 수업종을 듣고 난 때였다. 단체생활에 묶인 학생들이 비운 복도를 맨발로 걸어와 문이 열렸다.
피투성이였다. 복도는 피, 발자국, 핏물로 진창이 된 발자국으로 난자당해 있었다. 누군가 기겁하고 의자를 빼 밀쳤다. 도겸이 서있었다.
“씨발, 도겸. 내가... 이, 씨발. 내가 죽여버리겠다고 했잖아.”
헐떡이는 도겸은 새하얀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체육대회에 기겁을 하고 싫어하던 그것보다는 조금 더 두껍고, 무늬는 없었는데 다소 피에 젖거나 헝클어졌지만 진짜같다. 그의 연갈색 머리가 피에 떡이 되어 망가져있었다. 까발려진 팔뚝에 주삿바늘을 매달았다. 안쓰럽게 터진 입가가 강박적으로 떨렸다. 말을 계속 저는 건 그런 이유 같았다. 누군가 또 작게 비명을 질렀다. 마치 그가 병원을 막 탈출한 환자라도 되는 것 처럼.
타박, 탁. 피에 젖은 맨발로 교실 안을 한 걸음씩 헤집고 들어오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이미 1교시부터 쭉 늘어져 자고 있던 도겸이 졸린 눈으로 고개를 든다.
“이 좆, 같은, 새끼야.”
도겸이 두 명이다.
보라색으로 부르튼 손등의 핏줄부터 새빨갛게 충혈된 눈가, 입술... 멀끔 바라보던 도겸이 한 번 웃었다. 겸의야. 도겸은 안쓰러울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다. 몇 발짝을 더 가더니 사물함을 붙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방금까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치던 애도 금방 튀어나가 등을 붙잡아줄 기세였다. 도겸이 왼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오른눈은 시퍼렇게 뜨여 눈가가 경련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옆에서만 보면 가련하게 헐떡이는 모양새였다. 그의 굽은 등 뒤로 핏방울을 짓뭉개며 걸어온 빨간 길이 보였다.
“처박아 놓고, 씨발. 나, 나를... 나만...”
“야, 신발 안 맞아?”
“도겸!”
도겸이 도겸에게 달려든다. 그건 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한쪽은 멀쩡하게 다림질 된 교복을 입고 있었고, 다른 한 쪽은 피투성이의 환자복 차림이었으므로, 둘 사이에서 누가 가해자처럼 보일지는 양상이 뻔했다.
도겸이 와이셔츠 칼라를 꽉 쥐어 채자 그의 손등의 핏줄들이 도드라지다 못해 부풀었다. 초록색이다가 보랏빛으로, 꼭 풍선껌 같은 색깔이었다. 그는 우는 것 같았다. 눈물이 아니라 콧물인 것 같기도 했는데, 어쨌든 주체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같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그가 도겸이 선을 넘어 미쳐버리면 그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따위의 생각은 하지 못했다, 도겸은 언제나 아슬아슬한 시한폭탄처럼 굴고 있었는데도.
그때 도겸은 웃으면서 앉은 채 신발을 벗고 있었다.
이미 활짝 열려있던 뒷문으로 남자들이 밀려 들어왔다. 그들은 도겸을 끌어냈다. 도겸이 막 벗은 자기 운동화를 밀어주며 마른 복사뼈가 드러난 발목을 쥐고 신발을 신기고 있었다. 도겸이 몸부림쳤고 걸치기만 했던 오른발에 걸려있던 운동화가 교실 뒷편 구석으로 나동그라졌다. 도겸이 팔과 손들에 붙잡힌 채 악을 쓰려고 했다. 왜 내가, 내가 먼저, ...했단 말이야!
교실 문에 머리가 걸리지나 않을까 싶을 만큼의 장정들에게 끌려가는 도겸은 훨씬 마르긴 했지만 도겸과 비슷한 길이나 크기였다. 그는 얼마간 저항하더니 고꾸라졌다. 교실 안에서 다시 비명이 터졌다. 커다란 감동에는 기립박수가 따르는 법이라서, 애들은 전부 의자를 내팽개친 채 서 있었다. 쥐어 잡혀 얻어맞았는지 코피가 터진 도겸만 예외적으로 얌전했다.
뒤늦게 선생님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도겸이 여상하게 가방을 챙겼다. 쫓거나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수업이 듣기 싫으면 불쑥 가방을 싸서 사라지곤 했다. 걔는 종종 불성실했으니까.
문제아라는 건 꽤 평범한 거야, 그렇지?
운동화 한 쪽이 끌려가지 않고 남아있다는 걸 나도 알고 걔도 알았는데도, 도겸은 맨발로 교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