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da }

독수리 조련

로그

2019. 7. 13. 01:47

​이런 시대에 현존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구식의 낡은 방이었다. 취조실을 가장하는 듯한 회벽에서는 축축하고 음습한 공기와 옅은 곰팡이 냄새가 난다. 머리 위에서 낡은 조명이 녹이 슬어 삐걱이는 소음이 마치 인간에게 계시하는 신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러스크는 이성적으로 자신이 군에 입대한 이후로 십여년 동안 무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는 싸구려 백열등을 더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후광으로 착각하지 않기 위해 눈을 찌푸려 감는다. 눈꺼풀 만큼이나 몸이 물먹은 솜 마냥 무거웠다.

그는 약에 취해 거의 몸을 가누지 못했다. 정신을 못 차리고 고꾸라져 꼼짝도 하지 않고 손톱만큼의 호흡만을 유지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죽은 듯 쓰러져 불면으로 미루던 잠을 몰아 자는 것은 대개 금전적 보상이 입금된 것을 확인한 다음의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재수가 없었다. 비 맞은 짐승의 새끼마냥 미약한 숨 마저 제대로 삼키지 못 하다가 갑작스레 헐떡이며 채 십 초도 붙이지 못한 눈을 크게 뜬다. 잠이 쏟아지는 것처럼 몽롱했지만 혼자 펄떡대느라 쓰러져 자는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멋대로 정상과 비정상의 수치 사이에서 널을 뛰는 신진대사가 달가워 스스로 팔목에 주삿바늘을 꽂던 철없는 시절이 그에게도 분명 있었으나 한참 옛날의 일이다.


“이 새끼 뻗었어?”


가죽 구두의 각진 앞코가 러스크의 허리 부근을 걷어차듯 들쑤셨다. 불친절한 인사법이다. 러스크는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호흡이 흐트러지며, 동공이 열리고, 눈이 풀리거나 손끝이 차게 떨리는 신체의 이상징후들을 태연히 받아들이는 것은 약을 놓은 주사기가 제 것이었다 해도 아마 되지 않았으리라. 아... 쥐어짜내 뱉은 작은 탄식이 저에게나 간신히 들릴 크기로 목구멍을 맴돌았다.


“눈은 뜨고 있는데.”

“눈만 뜨고 있잖아.”


러스크는 죽은 듯 누워 있다가 발작하듯 숨을 쉬고, 다시 진이 빠져 바닥에 얼굴을 처박는 것을 이미 열댓번은 반복한 다음이었다. 그는 그 횟수를 세는 것보다 차라리 몽롱한 머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리는 게 빠르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기동병이었고, 뒤로는 암살병이었다. 러스크는 이중 소속이면서도 그의 역할에 대해 어떤 불만도 갖지 않는다. 순전히 암살 임무에 대한 보상금이 월급과 따로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가 가끔 군에 대한 충성심과 전혀 연관이 없는 사적인 원한 관계를 청산하는 데에도 동원되곤 한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러스크는 달갑게 그 일들을 처리했다. 그런 것들은 페이가 높다, 원래 더러운 돈이 비싼 법이었다. 선금 오천을 받고 시작한 의뢰는 탈 없이 진행하면 오천을 더 얹어줄 만큼 중대하고─지저분하고─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계산에 산채로 적진에 잡혀들어가 파김치마냥 약에 절여졌을 경우에 배당되는 위험 수당은 따로 없었다.

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수당이 나오면 삼 초만에 잊혀질 불만이었다.

러스크의 계산에서 빠진 게 있었다면 뒷길을 트기 위해 목표물을 충분히 뒷조사 할 여유가 없었던 짧은 데드라인이다. 어찌나 뒤가 구린 지 거의 양날의 검이었다. 시간이 없어 다소 성급히 투입했더니 옴짝달싹 못하고 잡히고 말았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필히 소속과 목적, 뒷배를 캐내기 위한 고문일 것이다. 상부에 남김 없이 보고할거다. 좆같네.

선금을 받은 지 딱 일주일만에 제거한 타겟의 나이가 고작 여덟 살 난 어린애라는 것보다 스물 여덟살인 제 손목에 무지막지하게 이만한 바늘을 쑤셔넣은 쪽이 명백히 더 질이 나쁘다고, 러스크는 확신했다. 막 자라나는 푸른 싹을 두부 자르듯 뭉텅 썰어버린 게 본인이며 이게 일종의 업보라는 건 알 바가 아닌 것이다.

러스크는 지금까지 억지로 들이부어진 약이 어찌나 많은지 치사량을 넘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 무슨 약인지도 모르겠는데 기분이 좆같은 걸 보면 코카인은 아니다. 이 정도는 역겨운데... 아직 선금만 당겨받고 못 받은 게 몇 천인데 이대로 뒤질 수는 억울해서 안 될 일이다. 흐린 눈을 깜빡인다.

다시 한 번 뇌를 휘저어 계산해낸 결과 여기서 벌떡 일어나 놈들을 다 쏴죽이고 멀쩡히 걸어나갈 확률은 무려 3퍼센트나 되었다.



약에 취한 그는 끈질기게 침묵을 지켰다. 원체 누가 말을 걸지 않으면 나서서 대화를 이끄는 것이 피곤한 사람이라 그렇다지만 이번에는 이유가 다르다, 시간이 몇 시 인지 물어보려 벌린 입술이 통제가 되지 않고 입매가 풀려버리는 탓이었다. 발음은 커녕 목울음마저 할 수 없었다.

말조차 하지 못하니 시간이 영원처럼 느리다. 비좁은 단칸에 대강 던져진 채 덩그러니 구겨져 있게 된 게 언제부터인지, 가늠하기를 아예 포기할 무렵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를 거칠게 일으켜 앉혔다. 아, 다물린 입술이 열리며 아주 오래간만에 음절을 만들었다. 지구가 한 바퀴 출렁이는 감각에 허공을 바라보는 초점이 어긋난다. 강제로 물 위로 낚아올려진 물고기처럼 의자에 앉혀지자 그는 성의 없이 두어번 펄떡였다. 피가 새로운 방향으로 팽팽 돌아 미친듯이 치솟는 어지럼을 견딘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구식 전기의자도 아니고, 이게 무슨. 딱딱한 등받이의 철제 의자는 러스크의 체구에 약간 작은 감이 있었다. 러스크는 그 와중에 이게 진짜 전기의자였다면 물론 그를 묶어놓는 것보다 박물관에 기증하는 게 비싼 값을 치렀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 전기장치는 없지 않을까? 약 기운을 떨치려 그가 고개를 뒤로 젖히자 항상 긴 꼬리를 내리며 묶여있던 머리칼이 온통 흐트러진 채 따라 흘러내렸다. 러스크는 몽롱한 표정이었다. 의자 양 손잡이에 우악스레 붙잡혀 묶인 양 팔을 덜컥이더니 쓸데없이 두번은 시도하지 않고 얌전해진다. 순응은 쉽고 때로는 현명하다.


“얼마나 넣었어?”

“5ml에 한 캡슐.”

“더 먹여야 기억이 안 나.”


탁, 하는 소음과 함께 눈이 아플 정도의 밝은 빛이 눈을 찔렀다. 주체를 못 하고 풀려있던 동공이 직사광선을 그대로 담아 눈물이 날 정도로 아렸다. 플래시를 연상케 할 정도로 터무니 없이 밝은 조명이었다. 그것도 양 옆으로 두 개나. 빛을 피하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다가 턱을 잡혀 그마저도 실패한다. 얇은 눈꺼풀이 눈을 감아도 눈부심을 상쇄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눈 떠, 그렇게 명령하는 것 같았지만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실명하고 싶지 않았던 러스크는 들리지 않는 척 했다. 곧바로 머리채를 쥐어잡힌다. 이럴 때에 그는 늘 진작 그 긴 머리를 자를걸, 하고 후회했지만 매번 그러지 않았다.


“어디서 널 보냈는지 말 해.”


아주 공격적이고 강압적인 어조였으나 사람을 굴복하게 하는 힘은 자신의 상관 발 끝에도 못 미쳤다. 무전으로 늘 그런 목소리만을 듣고 일하던 귀에 그것은 마치 자장가처럼 겉돈다. 자신에게 하는 추궁인 듯 했지만 머릿속이 흐물흐물하여 그저 조명을 치워줬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다. 불성실한 태도를 보인 탓에 뺨을 세게 얻어맞아 골이 흔들리자 낮게 신음한다. 그는 이가 날카로워 우유를 마시다가도 입 안이 베이는 사람이었다. 순식간에 혀끝에 비린내가 돌았다.

솔직히 정보를 캐고 싶다면 돈을 내는 쪽으로 했으면 좋았을텐데. 그는 군법을 기만하는 데에 꽤나 일가견이 있었다. 그걸 알아주지 못한다는 게 안타까워 눈물이 다 났다.

러스크는 아주 오랜만에 기절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동공을 조일대로 조여 어느정도 눈을 뜰 수 있게 되었지만 깜빡 정신을 놓고 싶어진 것이다. 그의 고개가 푹 꺾였다. 하지만 남자들은 용납할 생각이 없는 듯 그의 머리채를 쥐고 귀에다 대고 큰 소리를 내며 잠을 깨웠다. 어렴풋이 좆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아주 개새끼들인데... 화들짝 놀라며 겨우 정신줄을 붙잡은 러스크의 머릿속에서 이번 임무의 위험수당에 관한 망상이 시작되었다.



러스크의 출신은 이곳이 아니었다. 그는 혁명 당시 4구역에서 자본력으로 사 온 용병이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을 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엔 아주 얕은 신뢰와 충성심으로 유지해 온 전력이었기에 그는 모든 대원들을 통틀어 가장 혹독한 훈련을 견뎌야 했던 사람이었다. 4구역에서 돈을 주면 뭐든 하는 용병질을 할 때나, 1구역의 군인이 되어 타인의 권력에 충성할 때나 러스크의 취급은 아주 거칠었다. 겉으로는 빠르게 승진하며 순탄한 삶을 밟아온 유능한 군인처럼 보이지만 단언컨대 그가 겪어야 했던 과정은 다른 누구보다 무거웠던 것이다.

그는 까라면 깠고, 구르라면 굴렀다. 필연적으로 아주 뭣같은 상황에 던져졌지만 무감각하게 굴었다. 그에게는 아주 많은 피학의 전적이 있었다. 뭐만 하면 생살을 뜨고 피부를 저미는 고문에 너무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러스크는 대개 그 모든 것들을 참아냈고, 둔감해지는 법을 익혔다. 하지만 그렇다고 잊은 것은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 어떤 잔학한 기억이라도 또렷하게 갖고 있는 편이었다.

그의 기준에서도 그들은 정말이지 질이 나쁜 축이었다. 러스크는 고통을 감내하는 데에 자신이 있었고, 그렇게 키워졌으나 상대는 그를 산채로 회를 뜨거나 하는 데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인질의 입에서 진실을 끌어내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진짜 악질들만의 방식이다. 동류였던 러스크가 그것을 가장 잘 알았다.

백야, 하얀 밤.
그 말뜻을 알고 있었다.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그렇게 불렀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전해져 현존하는 고문이라면 죄다 겪어본 그에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깜빡 정신을 놓을 뻔 했는데 고개가 떨어지자마자 귀 바로 옆에서 터지는 소리가 났다. 쾅 하는 파열음에 저절로 움츠러들며 눈이 떠진다. 이대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지, 그 전에는 얼마나 버텼더라. 기억은 그 어떤 정보도 허락하지 않았다.

인간을 파김치마냥 약에 절여 놓고 잠을 재우지 않는 방식은 본래 사냥용 맹금류를 길들이는 방법에서 이어졌다. 잠을 자려 할 때마다 강한 빛을 쬐거나 큰 소리를 내어 억지로 깨워두면 아무리 사나운 독수리라도 이내 곧 풀이 죽고 만다. 러스크는 앞에 선 사내의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밝은 조명 빛 앞에서, 그게 뜨겁다는 생각을 했다.


“약까지...”


먹일 필요는 없었잖아. 잠을 안 재우는 것 만으로도 인간 하나를 미치게 만들기는 너무 쉬웠다.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발음이 늘어졌다. 머리가 멍하게 쿵쿵 울려 구역질이 난다. 고개를 돌리거나 숙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아 그는 조명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기 위해 허공에 시선을 고정하려 부던히 애를 썼다. 곧 감각이 하나하나 눈을 감는 것이 느껴졌다. 붕 뜨는 정신은 이미 제 것이 아니다. 이대로 어떻게 버틸 수 있지, 얼마나 ... ...



***



“진입 합니다.”


페이는 두 마디, 세 마디의 오더를 기다리지 않는다.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거칠게 진입하여 최단거리로 붙자 곧장 지저분한 난타전이 시작되었다. 동료와 엉겨붙은 적군을 겨눈 권총들이 어설프게 불을 뿜는다. 곧 체크포인트가 확보되자 저격수의 백업이 이어졌다. 이 정도의 난투를 감당하기엔 너무 작은 방이었다. 곧장 아수라장이 되는 바람에 러스크의 얼굴을 비추던 조명이 넘어져 깨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하얀 머리칼이었고, 어쩌면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곧 상황실로 중위의 신변을 확보했다는 무전이 들어왔다. 그들의 상관은 뒷수습에는 관심이 없는지 짧은 답신도 돌아오지 않는다. 작전은 곧장 하사의 권한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가 대체로 한 가지의 명령만을 내린다는 건 부대원 모두가 알고 있었다. 몰살.

총탄의 폭발음이 기절한 러스크를 깨우지 못했을 정도로, 그는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정신을 잃은 건지 죽은 건지 분간이 가지 않자 도겸이 그 옆에 꿇어 앉더니 그의 주머니를 뒤졌다.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겉주머니 안주머니 할 것 없이 모조리 까뒤집는 동안에도 미동도 하지 않자 겸이 진지하게 운을 뗀다.


“죽은 것 같은데요?”


이내 겸의의 손에 끌려나간 겸 대신 성실하게 맥을 짚어보고 ‘살아는 있다’는 판정을 내린 건 은성이었다. 고문 당한 것 같지? 몸에 핏자국이나 멍, 상처 하나 없었으나 추측할 수 있는 건 하나 뿐이다.


“돈 먹이면 불었을텐데.”

“술술...”

“한 1억 정도...”

“하긴 1억을 가지고 있을 것 처럼 생긴 놈은 없긴 했어.”


그치? 임무를 하다가 뻗은 사람을 앞에 두고 쌍둥이 둘이 신나게 실례되는 말을 주고받는 동안 페이가 묵묵히 그 반쯤 시체인 몸뚱이를 제 어깨에 들쳐 맨다. 증거 현장의 폭파는 은성이 맡았다.



러스크의 진단 결과는 처참했다. 복귀하여 간호장교의 진찰을 받고 병상에 누운지 벌써 만으로 이틀이 지났다. 이거 부검하려고 눕혀 놓은 거 아니죠? 반평생 페이의 반인륜적 농담따먹기에 길들여진 타오위가 도겸의가 거는 태클에 태연히 검시 결과는 일주일 정도 기다려야한다는 답을 내놓자 듣던 우현이 싫은 표정을 지었다. 하사나 너나 저새끼나 거기서 거기라는 얼굴이었다.


“시력 손상이 있고, 눈이 좀 탁한데?”

“그건 원래 그랬습니다만.”


그랬나... 타오위가 멍청하고 방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네 동료라는 자각이 있습니까? 우현이 목구멍까지 들어찬 하극상을 간신히 참고 있다는 걸 알아챈 은성이 우현의 눈치를 살폈다.


“대체 혼자 뭘 하고 다닌 거야?”


페이는 대놓고 마음에 안 든다는 내색이었다. 러스크가 없는 동안 혼자 최전방에서 구른 게 어지간히 불만이었던 것 같았다. 며칠씩이나 자리를 비운 것도 어이가 없는데 뜬금없이 그를 구출해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땐 기어코 욕이 튀어나와 은성이 급히 그의 무전을 끊었다는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다.

서로 관심이라곤 성냥개비만큼도 없으면서─아마 콜네임만 겨우 외웠지 본명은 알지도 못할 것이다─빈자리는 큰 모양이다. 하여튼 어른스러운 구석이라곤 요만큼도 없다. 저기요 일단 환자라는 자각이 있는 거냐고요, 어떻게든 뱉고 뒤지고 싶은 말들이 턱끝까지 올라온다. 은성은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성숙한 상관이 이렇게 하나도 없이 죄다 애새끼 뿐이라서야 애가 뭘 보고 배우냐고, 은성과 동갑인 또다른 애새끼가 속으로 탄식했다.

우현은 러스크의 개인 엄호를 맡아본 적이 종종 있었다. 대개 무슨 임무인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고 까라면 까라는 식으로 끌려갔지만, 중위가 워낙 날고 기는 탓에 할 일도 그다지 없어 불만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러스크가 뒤에서 따로 받는 명령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이 생겨난다. 이번에도 아마... 그런 일을 하다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눈칫밥이라면 실컷 먹은 탓에 결론까지 도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우현은 그 사실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철저한 개인주의로 움직인다는 사실은 당장 러스크의 사정에 손톱만큼도 신경쓰지 않고 있는 페이 하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뭐 고문이라도 당한 건가 싶었는데 딱히 심한 외상이나 내상은 없고. 그게 좀 이상한데...”


외상이나 내상은 없는데 상태는 별로 좋지 않다. 아무 이유 없이 쇠약한 상태인 것이다. 엄청난 마약의 흔적이 줄줄이 발견되자 타오위는 러스크를 미쳤다고 생각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탈영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타오위가 정신나간 소견을 내 놓자 페이가 생각없이 그에 동의했다.

어쨌든 러스크는 굉장히 중요한 전력이었고, 그가 전투에서 빠지자 이후로 페이의 자잘한 부상이 무시할 수 없는 정도까지 누적되었다. 그 탓에 쓰러진 러스크를 단지 구경하기 위해 병동을 찾은 페이에게까지 입원 명령이 떨어졌다. 러스크에게는 약간의 혼수상태가, 페이에게는 병상 신세가 허락되었다. 생과 사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신분이었던 그들은 주어진 기간 안에 몸상태를 회복하기를 권고받았고 그 책임을 고스란히 뒤집어 쓴 간호장교 타오위가 우는 소리를 낸다. 모두가 그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 보다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짧은 휴식에 기뻐하는 쪽을 택했다. 어떻게든 업혀서 병원 침대에 한 번이라도 누워보려던 쌍둥이는 그들을 돌봐줄 의무병이 타오위 하나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조용히 입을 닥쳤다.



러스크는 정확히 52시간 만에 눈을 떴는데, 플랙이 이틀의 말미라는 자비를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회복의 기미가 없는 것에 몸소 병동을 찾아 온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 의식이 없을 때도 돈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 모양이었다. 눈을 뜬 러스크는 태연하게 중령에게─입으로─경례부터 했다. 좀 전까진 맥이 약해 죽을 것 처럼 보였는데 역시 명이 질긴지 멀쩡한 것처럼 군다. 누가보면 자고 일어난 사람 같았다.

눈이 부신지 인상을 찡그리자 표정이 영 뚱한 게 누가보면 상관을 대하는 싸가지가 단단히 돌아있었지만 플랙은 그런 시시콜콜한 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임무가 버거웠냐고만 묻고 그렇진 않다는 답을 듣자 중령은 한쪽 눈썹을 찡그리더니 더 말을 얹지 않았다.

기어코 어떻게 된 거냐는 물음을 던진 건 타오위였다. 러스크는 덤덤히 얼굴을 찌푸리더니 정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그의 표정변화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 누구도 없었지만─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했다. 필름이 끊긴 것 마냥 기억의 반토막이 하얬다.



“기억이... 진짜 안 나는데.”


교육의 끈이 짧았지만 머리통에 문제가 생겨본 적은 없던 러스크가 딴에 꽤 충격적인 고백을 뱉었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신중하게 듣지 않았다는 게 티가 나서 그는 약간 억울해졌다. 중령은 러스크가 계약에 명시된 비밀 엄수의 조항에 따라 입을 다물었다고 이해했는지 이미 돌아 나간지 오래였다.


어떻게 된 일이더라. 제거 대상이었던 여덟 살 꼬맹이가 겁에 질린 얼굴을 하기도 전에 뭉텅 썰려 객사하던 그 순간부터, 자리를 벗어나다가 일이 꼬여 덜미를 잡히던 것 까지는 어떻게 생각이 난다만 그 이후에 눈을 뜨니 여기다. 암살 임무에 부대원을 붙였을 리 없으니 중간에 뭐가 더 있긴 할텐데 아예 지워진 듯 하얗자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눈이 따끔따끔한 게 꽤 오래 잔 듯 싶은데도 피곤이 머리를 짓눌러 생각이 느리다. 눈꺼풀을 깜빡이는데 빛무리의 잔상이 시야에 자꾸 잡혀 눈물이 고였다. 왜 이러지. 어딘가 콕 집기 어려운 이상징후들이 이어지는데 평소에 말을 길게 하거나 쓸데없는 정보를 늘어놓은 일이 없던 그에게 더이상의 설명을 기대하는 사람은 놀랍게도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놀라운 전우애에 이내
생각하기를 멈춘다. 굳이 알지 못해도 괜찮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당장이틀 후에는 전선에 복귀해야 한다. 그게 제 일이었고, 그는 스스로의 역할에 충실한 용병이기를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사냥에 쓰이는 독수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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